지성은 흐르는 것을 혐오하고 자신이 접촉하는 모든 것을 고체화한다.
우리는 실재적 시간을 사유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체험한다.
생명은 지성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우리의 진화 그리고 순수 지속 속에 있는 모든 사물의 진화로부터
우리가 갖는 감정이 거기에 있어서,
이른바 지적 표상의 주위에,
밤 속으로 사라져 가는 불분명한 가장자리를 그린다.
기계론과 목적론은 중심에서 빛나는 핵만을 고려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것들은 이 핵이 그 나머지 [가장자리]가 응축에 의해 희생됨으로써 형성되었다는 것
그리고 생명의 내적 운동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응축된 것(핵) 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전체, 즉 유동체(du fluide)에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아카넷, 2009, p.87.-
"흘러가는 것"
감희의 방문에는 뚜렷한 이유가 있다. 아니 목적과 지향점이 있다고 해야 옳겠다.
5년간 단 한 번도 떨어지려고 하지 않는 남편으로부터 벗어나 숨을 쉬어야 했다.
인왕산이 보이는 뷰가 좋은 집, 혼자서 싱글 생활을 하는 언니들의 모습, 자유로운 예술가,
그런 것들이 감희에게 필요했던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감희의 목적지로 향하는, 빙 둘러가는 과정인 듯하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서로는 서로가 갖지 못한 것을 부러워한다.
그들은 감희의 남편을 '좋은 남자'로 단정 짓거나 포장한다.
감희의 인생이 '운이 좋은 것'에 해당한다고도 생각한다.
물론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 안에는,
어느 정도의 위로와 어느 정도의 가식이 혼재되어 반복된다.
그리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에게서 감희는
어찌해도 벗어나지 남성적 공격성으로부터 도피하지 못하는 광경을 본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언어의 반복, 행동의 반복, 상황의 반복은 차연을 낳는다.
우진은 남편이 같은 말을 반복하기 때문에 그 행동과 말에 진심이 담겨있지 않다고 불평한다.
그러나 감희는 반복되는 이야기 안에도 차이가 있음을 안다.
어쩌면 그래서 자신만이 그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착각했을지 모른다.
감희는 결국 정선생에게 우진의 말을 대신 전하면서, 내심 자신의 갑갑했던 감정을 토로하고 만다.
그제야 감희는 숨통이 트임을 느낀다.
감희가 단행한 이 외출의 종착지는 정선생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동반되는 부수적인 만남들, 부스러기 같은 언어들, 덜 중요했던 만남, 우연히 발생한 갈등,
전해진 선물과 전해지지 못한 선물, 이런 것들이 이야기의 주제가 되고 영화의 정서를 풍성하게 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영화는 정확한 언어로 박제하는 순간, 빛을 잃어버리는 느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