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까지만 해도 사느냐 죽느냐 하면서 심각을 떨었는데,
정작 정말로 위기에 처하고 나니 오히려 관점이 분명해졌다.
어떻게 버틸 것인가, 이 고통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대비해야 했다.
예를 들어 주변 가족들에게 알리고, 위로하고, 감사하는 일들.
주변의 시선에 대담해지고, 나 자신을 지켜가는 일들 같은 것들 말이다.
이쯤 되니 삶의 목표가 단순해지고 분명해졌다.
내가 세상에 데리고 나온 이 아이를 상처받지 않게 잘 키우는 것.
예전에는 아이가 내 인생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걸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으스러지고 부서져도, 저 한 아이 올곧은 성인으로 키우는 게
내게 주어진 임무이자 의무구나, 하는 것을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도 그 분과 딜을 한다. 오만하게도.
이 날의 진료 목표는 HER2 결과를 듣고, 그에 맞는 치료 방향과 입원 시기를 정하는 것이었다.
HER2 표적치료를 받느냐, 삼중음성이 되느냐, 둘 중 하나였다.
유방암 환자분들은 경험한 바가 있어 알 수 있겠지만,
이 두 결과는 환자에게 천국과 지옥과 같은 차이가 있다.
다행히도 HER2 양성이라는 결과를 받았다.
이 즈음되니 돌고 돌아 유방암 환자 치고는 나쁘지 않은 결과를 받은 셈이 되었다.
호르몬 수용체 음성, HER2 양성은 무엇보다 효과적인 치료제가 개발되어 있다.
죽다 살았다는 게 이런 건지 모르겠다.
평범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1년에서 5년 정도 고생하면, 아이를 내 손을 키울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를 다시 살게 하셔서 다른 쓰임을 주시려는 건지도 몰랐다.
본격적인 치료 방향이 잡혔다.
여러 방법 중 TCHP 선행화학요법 + 수술 + 후행화학요법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TCHP는 도세탁셀 / 카보플라틴 / 트라스트주맙 / 퍼투주맙의
네 가지 화학약물을 이용한 항암치료제다.
TC는 탁소텔(Taxotere)과 카보플라틴(Carboplatin)을 의미한다.
이 두 약은 항악성종양제로 세포분열을 저해하는 지옥의 탁센계, 탁솔계 약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수많은 부작용을 동반한다.
HP는 허셉틴(Herceptin)과 퍼제타(Perjeta)를 의미한다.
이 두 약은 표적항암제에 속한다.
허셉틴은 트라스트주맙을 사용한 약품 중 하나로, 삼페넷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트라스트주맙은 HER2/neu 수용체를 표적으로 하여 종양세포의 증식을 막는다.
암세포에 선택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정상세포에는 독성이 덜 나타나고, 그만큼 부작용도 적다.
특히 완전관해의 효과가 높다는 결과가 있어, 교수님도 처음부터 소개해서 알고 있었던 약이었다.
'완전관해'라는 표현도 처음 듣는 것이었다.
암(cancer) 치료 판정 기준을 나타내는 용어의 하나로, 암치료 후 검사에서 암이 있다는 증거를 확인하지 못한 상태. 완전반응(complete response)이라고도 한다.
완전관해라고 해도 암이 PET/CT나 MRI에서 보이지 않는 것이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후항암과 꾸준한 관리가 필요하다고는 하나, 암환자들에게는 큰 희망이 되는 용어였기 때문에
불안감이 컸던 나도 마음이 한층 놓이는 일이었다.
그동안 살고 싶지 않다고, 어리광을 부리던 내가 속으로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를 외칠 정도였다.
마지막 퍼제타 역시 표적항암제로, 퍼투주맙(pertuzumab)이라고 한다.
(이런 약 표현들을 교수님이 너무 빠르게 이야기하셔서 메모해 두었다가 더듬더듬 찾아가며 공부하느라 귀가 바빴다는 건 비밀... )
퍼투주맙은 전이성 유방암과, 조기 유방암에 사용된다고 한다.
특히 HER2 양성 환자 중 전이성이 있거나 절제할 수 없는 유방암 환자들에게
도세탁셀, 트라스트주맙과 함께 사용하면 효과가 있다고 한다.
아쉬운 점은 비용 문제였다.
선행화학요법에서 포제타를 사용할 때, 부분 급여가 인정되어 환자가 약제비의 30%만을 부담해야 하는데,
후행화학요법에서는 100%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손보험이 있을 경우에는 포제타를 사용하는 것이 덜 부담되지만,
입원을 하지 않는 경우라든가, 실손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환자들에게
의사가 후행항암요점에서 포제타를 권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나도 이 점이 우려되어 선행항암을 진행할 때 요양병원 입원을 되도록 하지 않았다.
HP는 TC에 비해 즉각적인 부작용이 많지 않고, 표적치료제로서의 효과가 좋다는 장점이 있지만,
심부전, 과민반응, 아나필락시스, 간기능 저하 등의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어
정기적으로 검사를 해야 한다는 특이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TCHP 요법은 70~80% 완전관해율을 보인다는 발표가 있다.
(https://www.koreabiomed.com/news/articleView.html?idxno=14750 참조)
부작용보다도 중요한 것은 항암 효과가 좋아서 치료가 잘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치료 일정을 잡고 씩씩하게 인사한 후에 진료실을 나왔다.
기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