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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프란츠 파농 번개 세미나 // 『검은 피부 하얀 가면』 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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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흑인과 정신병리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가족’에 속한 사람의 행동양식을 바탕으로 한다. 가족의 구조와 국가의 구조가 상동성을 지니며, 아버지의 권위가 곧 국가의 권위와 동일시된다는 점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명화 된 가족은 국가의 축소판으로 이해되어 왔으며, 그 안에서 성장한 한 개인은 한 가정의 아이이자, 국가의 일원으로 파악된다. 백인 가정에서의 가부장적 권위는 국가에서 재현된다. 그러나 프란츠 파농은 프로이트가 유색인이 겪는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판단한다. 오히려 유색인은 백인과는 정반대의 경우를 보인다는 것이다. 파농은 정상적인 가정에서 태어난 유색인이라고 할지라도 백인과 접촉하면서 비정상적으로 성장하게 된다고 분석한다. 20세기 프랑스에서는 흑인과 백인의 동화가 아주 철저히 이루어지고 있지만 흑인의 신경증적 반응은 여전히 존재한다. 저자는 그 원인을 심리적 외상(트라우마)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백인의 가족제도는 곧 백인의 사회제도와 상동한다. 따라서 백인의 가족은 사회적 삶을 훈련하는 장이기 때문에 가족에서의 행동이 사회적으로 용인된다. 하지만 앙띨레스의 흑인은 가족 안에서의 전통과 습관이 사회와 반대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점차 백인들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들은 백인과 함께 교육을 받기 때문에 세네갈 흑인을 무지하고 야만적인 존재라고 인식한다. 그리고 그들 자신의 피부가 검다는 것을, 그들이 흑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앙띨레스의 가족제도는 유럽사회와 어떤 관련도 맺지 못하기 때문에, 앙띨레스 흑인 청년들은 가족제도와 사회제도라는 분열된 양자 사이에서 선택해야만 한다. 이것이 앙띨레스 흑인들이 지니는 유아기적 분열증세다.

 


  백인들은 흑인을 생식기로 상징화하여 공포를 느낀다. 흑인은 성애화된 대상으로서, 유태인들이 무소부재하며 영악하기 때문에 전 지구를 정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흑인들은 성적 정력이 강력하기 때문에 백인들을 위협할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과 같은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여자 백인은 흑인의 정력을 두려워하면서도 욕망하며, 남자 백인은 흑인에게 질투하며 성적 열등감에 빠져들거나 흑인들을 가학한다. 백인들이 지니는 공포의 양가적인 감정은 실제로 흑인들이 과도한 정력을 지니고 있지 않더라도 그것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취급하고, 그러한 상상은 그대로 고착된다.(이마고) 흑인은 ‘동물적 존재’이며, ‘생물학적 존재’이자 ‘강간의 전문가’로 낙인찍힌다. 백인은 “타자를 의인화 한다. 바로 이 타자가 백인의 선입견과 욕망의 주춧돌이 되는 것이다.”


  양가성은 백인 심리학의 중요한 요소이다. 백인들은 흑인에게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신의 공격성을 드러낸다. 백인은 흑인들의 야만성, 자연스러움, 더러움 등을 강조하는 내용을 문학, 동화 등으로 반복적으로 재생산함으로써 흑인들을 가학하고 정복하는 과정을 정당화한다. 모든 악, 추함, 불길한 징후, 정신발달의 퇴행과 고착, 성적 우월성 등의 이미지를 흑인에게 부여함으로써 백인 자신의 열등감을 정당화하거나, 흑인에게 새디스트적 공격을 감행한다. 백인 스스로 무의식적 포로가 되는 이러한 상황이 백인의 신경증적 징후이다.


  흑인의 신경증적 징후는 위와 같은 백인의 공포증과 사회적으로 재생산된 흑인에 대한 지식들 때문에 발생한다. 앙띨레스 흑인의 대부분은 사회제도를 택한다. 백인들에게 승인받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흑인들은 백인들의 사회로 진입해야 하는데, 접촉할 때 흑인은 ‘어떤 민감한 행동’을 수반한다. 흑인은 그 스스로 행동하는 주체가 아니라 백인이 되고자 하는 ‘타자’를 자청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앙띨레스 흑인 스스로가 ‘흑인공포증’을 지니게 되면서 분열증을 겪게 된다. 샤를르 오디에는 모든 공포를 어머니의 부재, 유아심리에서 찾는데, 바로 앙띨레스 흑인에게도 잠재된 유아기적 공포가 내재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혹은 그 반대로 흑인들이 자신을 보편화하고자 하더라도, 흑인 자신의 네그리튀드를 찾으려 할 지라도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흑인 지식인들이 아무리 높은 지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지라도 흑인의 피부에 새겨져 있는 “본성”은 지워지지 않는다.



  여기에서 파농은 융 심리학을 확장한다. 융이 집단무의식을 선천적 대뇌의 질료에 존재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흑인 집단의 무의식은 원천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생물학적 원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편견과 신화, 한 기득권 집단의 집체적인 태도의 소산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본성”이 아니라 “습관”이었을 뿐이다. 스스로를 백인이라고 생각하고 성장했던 앙띨레스 흑인들이 청년이 되어 자신의 정체성과 마주쳤을 때 느끼는 분열증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백인들은 자신의 심리를 이해하기 위해 흑인성을 어두운 타자성으로 삼았으며 그 과정에서 “문화적 눈속임”이 시작되었다, 앙띨레스 흑인들은 유럽이라는 공간 안에서 살아가며 유럽인의 집단무의식의 원형을 이양 받았으며, 백인의 노예가 되었다, 는 것이 파농의 주장이다. 백인 문화의 “문화적 사기”는 흑인을 자신의 도덕적 희생양으로 삼으면서 “진보, 문명, 자유주의, 교육, 계몽, 합리성” 등의 신화를 공급해왔다는 데에 있다.



  앙띨레스인은 이러한 백인과 동일한 집단무의식을 교육받고 훈육 받아왔다. 흑인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피부색과 가족력은 흑인성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흑인이었다는 것을 자각한 이후로는 자기 스스로를 노예화하고 타자화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피부색이나 머리카락을 통해서, 감각적인 이미지를 통해서 그들의 자아가 방출되지 않기를 원한다. 순수한 양심의 소유자, 고급지성의 소유자 등의 윤리적인 층위에서 “총체적 백인성”을 달성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들의 피부는 여전히 검기 때문에 결핍을 느낄 수밖에 없으며,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 싸움을 지속해야 한다.



  프란츠 파농은 흑인성이라는 아우라가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어떠한 의견에도 강하게 반발한다. 파농은 자신과 같은 흑인들에게 타인이 규정한 “표본”을 극복하기를, 그리고 보편성을 추구하기를, 그리고 자신을 규정하는 모든 표본화를 넘어서기를 강권한다. 자신이 흑인이라는 사실에 대면하고, 공포와 경멸을 넘어서서 스스로를 인정할 것을 주장한다. 흑인에게는 흑인성이라는 아우라가 없다는 것을, 모든 인간은 동등한 권리를 지녀야 한다는 그 당연한 진리를 역설한다. “흑인 문제는 백인들과 섞여 사는 흑인들의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우연히 백인으로 태어났을 뿐인 식민주의자 또는 자본주의 사회 때문에 핍박과 노예화와 조롱의 설움을 당할 수밖에 없는 흑인들의 문제인 것이다.” 이는 어느 검은 피부색을 지닌 한 사람이 던지는 탈식민주의, 반자본주의의 선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