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가따리, 최명관 옮김, <앙띠 오이디푸스>, 민음사, 1994. 발제문)
자본주의 경제철학에서 말하는 “사회적 생산”과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욕망하는 생산”은 같은 층위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그 층위는 “인간과 자연의 구별 이전”(16)에, 즉 근대성의 이분법적 구분 이전에 존재했던 “생산의 과정”에 놓여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생산하는 욕망하는 기계들의 우주”이자 “인간과 자연의 본질적 현실로서의 근원적인 보편적 생산”이다.(20) 이곳에 욕망하는 기계들이 놓여있고 그들은 자유롭게 접속․생성한다.
마르크스는 자본가들이 ‘생산’, ‘분배’, ‘소비’를 구분하는 것은 ‘자본’과 ‘분업’이라는 전제를 놓치고 있다는 점을 비판했다. 그는 자본주의에 속한 잉여생산물의 비밀을 밝혀냄으로써(잉여생산물은 노동에서 비롯된다는 사실) 신비한 것으로 규정되었던 생산의 체계와 관계들을 밝혀낼 수 있었다. 정신분석학에서 “정신분열자”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신비한 존재로 머물러 있다. 정신분석자는 아직 “독특한 것”, “특수한 개인”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마르크스의 방법론에 따르면 정신분열자가 존재하는 중요한 전제를 놓치고 있기 때문에 그 존재가 신비화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인간과 자연이 분리되어 있다는 이분법적 의식 이전에, 정신분열자는 단지 “생산의 과정”속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정신분열증은 자폐증에 갇힌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인물로서의 정신분열자의 감정이기 전에, 욕망과 욕망하는 기계들의 생산의 과정이다.(46)”
생산과 획득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플라톤 이래의 철학에서는 생산과 획득을 이분화함으로써 대상에 대한 욕망을 ‘대상의 결여’ 때문에 발생한다고 이해하게 되었다. 따라서 욕망과 대상, 생산과 획득은 다른 두 세계에 배치되어버렸다. 다시 말해 “욕망이 결여하고 있는 현실적 대상은 외부의 자연적 혹은 사회적 생산에 관계하는 것인데, 욕망은 내적으로 상상적인 것을 생산하고 이것이 현실의 대역(47)”을 하게 된다. “<현실적 대상마다 그 배후에 몽상된 대상>이 있고, 혹은 현실적 생산들 배후에 정신적 생산이 있는 것과 같다.(48)” 이러한 인식 체계에서는 욕구들이 욕망의 결여를 대신 메워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들뢰즈는 이러한 분석에 대해 반박한다. 욕망이 생산하는 것은 곧 현실적인 것이다. 욕망은 “부분들을 움직이게 하는 수동적 종합들의 전체”(49)이다. 욕망은 아무것도 결여하지 않으며, 고정된 주체를 상정하지 않는다. 욕망은 생산물을 유목하게 하는데 그 과정에서 생겨난 ‘잔여물’이 곧 욕구라고 할 수 있다. 욕구가 결여된 욕망을 대체한다는 이론는 자본가가 시장경제를 의도적으로 결여의 구조로 만드는 것과 다름없다. “풍부한 생산 속에 결여를 조직하는 것, 모든 욕망을 결여에 대한 큰 공포 속에 던져 넣어 뒤집는 것, 욕망과는 관계가 없다고 흔히 생각하는 현실적 생산에 욕망의 대상만을 소속시키는 것(합리성의 요구들)이다.(51)
중요한 것은 다시 “사회적 생산”과 “욕망하는 생산”을 같은 층위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근대성의 이분법(인간/자연, 주체/객체, 자유/인과, 합리/비합리, 이성/비이성)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며, 사회체가 구성되기 이전의 “욕망하는 생산”의 자유로운 연접/분리의 공간이다. 사회체의 구성, 주체의 등장은 모두 억압을 전제로 한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자본주의의 본질, 특성에 대해 언급한다. 자본주의는 그 자체로 정신분열증적이다. “자본주의는 탈규준화의 경계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57) 이 경계에서 욕망의 흐름이 해방되며 정신분열적인 극한에 접어든다. 따라서 현대생활이 광기를 생기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생산의 진행’에서 등장하는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저자는 정신분열자를 미친 인간, 광인으로 보지 않고자 한다. 자본주의의 극한이 바로 탈규준화, 즉 정신분열을 내포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욕망의 흐름이 해방된다고 본다. 정신분열자는 사회적 억압에서 탈규범의 가능성, 기관없는 신체들의 연접, 이접, 접속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존재로 재호명되고 있다.
5. 기계들
기계들이 가지고 있는 세 가지 속성. 기계는 “절단들의 체계”로 정의된다. 모든 기계는 ‘흐름’과 동시에 ‘절단’한다. 절단은 연속에 대립하기는커녕 연속의 조건이 되며, 절단하는 접점을 연속으로 포함하거나 규정하고 있다. 모든 기계는 맞물려 있는 기계에 대해서는 흐름의 절단이지만, 그것에 연결되어 있는 기계에 대해서는 흐름 자체 혹은 흐름의 생산이다. 이와 같은 것이 “생산의 생산의 법칙(생산을 생산하는 법칙)”이다. 이러한 특징이 기계의 첫 번째 속성, <채취-절단>이다. <채취-절단>은 흐름의 절단에서 생산이 생산됨을 의미한다. 두 번째는 <이탈-절단>으로 모든 방향으로 이탈되는 연쇄이자 분열하는 특징이다. “흐름으로부터의 채취는 연쇄로부터의 이탈을 내포(66)”한다. 다시 말해 사회적 규범들이 규정된 연쇄, 혹은 고정된 정의를 만들어 내려고 할 때, 기계들은 연쇄를 이루는 시니피앙들을 채취하여 ‘다의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정신분열자는 바로 이러한 “흐름으로부터의 채취”와 “연쇄로부터의 이탈”을 수행하는 자이다. 세 번째 속성은 <잔여-절단>이다. 이것은 기계의 인접해 있는 부분을 생산하는 절단이다. 기계의 부분이 채취될 때 동시에 그 채취면이 ‘출산’, ‘생성’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부분은 전체와 아무 관계도 없다. 부분은 전적으로 홀로 그 역할을 수행한다”(67)고 볼 수 있다. 주체를 생성하는 절단은 결여가 아니다. 오히려 절단면은 주체를 형성하는 부분, 잔여로서 주체에 귀속되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절단들은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그것들의 종합이다. (연결, 이접, 연결의 특성)
<정신분석학의 초월론적 분석의 오류, 욕망의 전복가능성>
6. 세 종합의 요약
들뢰즈는 오이디푸스에 대한 믿음, 신화적 믿음에서 벗어나, 이데올로기적 형태로서 오이디푸스를 유물론적으로 환원시켜야만 엄밀한 학문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중요한 것은 오이디푸스가 신화라는 사실보다는 신화 그 자체가 실제의 생산에서 빗나가게 하기 때문이다. (욕망은 환상의 영역이 아니라 실재의 영역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간과 자연은 같은 외연에서 발생한다. 인간과 자연은 분리되어 있지 않는다. “무의식은 이러한 자연과 인간, 세계와 자연의 일체화 속에서 스스로 출생하였다.(167)” 따라서 무의식은 생산의 순환형태를 고수할 뿐이다. 그런데도 정신분석가들은 인간이 문화를 위하여 생산한다고 믿고 집착한다. 오이디푸스는 사후적인 해석과 의미부여를 반복함으로써 <오이디푸스의 제국주의>를 형성한다. 무의식은 의미에 집착하지 않으며 오로지 사용에 관한 문제들만을 제기한다. 의미를 먼저 전제하고 이 의미에 용법을 관계시키는 것을 이른바 초월론적(선험적, transcendantale) 분석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파생된 기준들은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하는 물음을 제기하고 치료의 기제로 사용한다.
욕망에 대한 세 가지 오류는 “결여”, “법률”, “시니피앙”이다. 이들 뒤에 존재하는 신학적 수행원들, 죄책감, 기호화작용 등은 모두 선험성을 지니고 있다. 정신분열자-분석의 실천적 과제는 이 선험성을 역전시키고 <무의식의 종합>들을 내재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탈오이디푸스화 하는 것, 아버지-어머니의 거미줄을 없애버리는 것, 신앙들을 깨부수어 욕망하는 기계들의 생산에 그리고 경제적 및 사회적 공급들에 도달하는 것(173)”이다.
7. 억압과 억제
오이디푸스적 이론은 근친상간이라는 왜곡된 심상을 만들어 욕망을 함정에 빠트린다. 즉 욕망이 어머니를 욕구하기 때문에 억제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 억제되기 때문에 사회적 ‘비정상성’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욕망이 억제되는 이유는 “욕망이 생기면 사회의 기성 질서가 의문시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욕망이 비사회적인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고 욕망은 사회를 뒤집어엎는다. 욕망하는 기계들이 세워지면 사회의 구석구석이 온통 폭파(179)”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회는 욕망을 억압하고 “위계질서, 착취, 예속이 그 자체로 욕망”(179)되도록 한다. “정신분석은 오이디푸스가 억제의 대상이면서 또한 초자아를 매개로 하여 억제의 주체이기도 하다는 관계”를 내세움으로써 “억제의 문화적 정당화”를 마련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이중 조작의 결과이다. 먼저 사회적 생산에 억압이 있다. 이 억압적인 사회적 생산이 억제하는 가족에 의해 대행된다. 또 다시 이 가족은 욕망하는 생산에 옮겨진 심상을 주고, 이 심상이 억제된 것을 가족적 근친상간의 충동들로서 표상한다.
제3장 야생인, 야만인, 문명인
3. 오이디푸스 문제
(“억제되는 표상표현”, “억제하는 표상작용”, “옮겨 놓아진 표상내용”)
니체는 <습속의 도덕성, 즉 인류의 가장 오랜 기간에 걸쳐 인간이 자기자신에게 행한 진정한 작업, 인간의 선역사적 작업 전체>를 규정한 바 있다.(220) 인간의 역사는 신체(사회)의 각 부분에 대한 법적인 힘의 체계를 세우는 것으로 묘사된다. 다시 말해 인간의 역사는 인과관계로 서술됨으로써 내재적인 규율을 지닌 것으로 평가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우발적 사건들의 역사이지, 필연의 역사가 아니다.(213)” 모든 흐름들은 ‘대지’ 위에서 자유롭게 연접, 이접, 연결의 과정을 겪으며 동시에 등록, 결연, 억제를 당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필연이란 개입할 수 없다. (대지는 “생산의 모든 진행이 등기되고, 노동의 대상들, 수단들 및 힘이 등록되고, 노동의 동인들과 생산물들이 분배되는 표면이다.(215)”)
저자의 이러한 사고방식, 혹은 개념을 (비교적)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요한 두 개념인 “토지기계”와 “유목공간”을 비교할 필요가 있다. “유목공간”이 욕망의 배종(杯種)을 가능하게 한다면, “토지기계”는 생산의 진행을 등기하고, 등록하는 역할을 한다. 등기하고 등록한다는 것의 의미는 사회체가 생산력을 자신에게 귀속시키고 대상들을 명확하게 규명하며, 사회체에 입사시키는 일이다.(22) 이 행위를 통해 인간은 생물학적 유기체가 아니라 하나의 ‘충만한 신체’, 혹은 ‘하나의 대지’가 된다. 이렇게 고정된 신체들 위에 사회체는 문신을 새기고, 만들어진 기억을 각인한다. 사회체는 유목과 다르게 ‘잔인성’을 내포하고 있다. 사회체의 본질은 곧 교환, 순환이 아니라 표시하고 등기하는 것이다.
‘충만한 신체’는 사회체 안에서 두 가지 양상을 보인다. 하나는 생산의 흐름들을 ‘등기’하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외연적으로 생산적 연결을 ‘결연’하는 것이다. 사회체가 생산의 흐름을 ‘등기’, 곧 규율화하고 제도화한다. 반면에 결연은 이러한 구조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고, 충만한 신체 자신에게 귀속하고 모든 것의 원인으로 귀결하게 한다. 결연의 역할은 바로 <오이디푸스>가 수행하고 있다. 결연은 신화적 인물들의 혼인을 통해 볼 수 있다. 근친상간의 원인을 ‘부자관계를 내세우는 가계의 질서’에서 찾는 것, 혹은 ‘아버지의 부재’라는 결여의 구조에서 찾는 것이 바로 그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근친상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근친상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욕망은 사회적 의미망, 혹은 이름들이 존재하기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부자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가계의 질서는 사회체가 부여한 2차적인 것이다. 결연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형제자매 혹은 부모와의 결혼을 ‘금지’한다는 ‘억압’를 전제해야 한다.
토지의 표상은 “억제되는 표상표현”, “억제하는 표상작용”, “옮겨 놓아진 표상내용”이라고 하는 세 결정기관을 내포하고 있다. “억제되는 표상표현”은 유목적인 ‘시니피앙의 흐름’에 가깝다. 배종적 임플렉스(implexe, 복합내용)라고 할 수 있는 욕망의 흐름, 또한 양의적인 기호들을 발신하는 에네르기, 무규준, 무질서의 복합이 곧 그것이다. 반면 “억제하는 표상작용”은 그러한 욕망들의 흐름을 억제하는 사회체를 의미한다. 규준화할 수 없는 것들에 공포를 느끼고 ‘결연’으로 억제하려 하는 표상작용, 즉 사회체가 바로 “표상”(reprèsentation)의 주체가 된다. 마지막으로 “옮겨놓아진 표상내용”은 바로 “오이디푸스의 형상”이다. 이것은 자연상태에 있던 욕망들이 사회체로 옮겨진 것이며 “올가미 내지 거짓 심상”이다. (247) 욕망의 표상표현에는 ‘엄마, 아빠’라는 고정된 기호를 지니지 않는다. 근친상간은 억제되는 표상표현을 억제하는 표상작용이 미치는 효과일 뿐이다.
4. 정신분석과 인류학
우리는 <가족적 재생산>을 <사회적 재생산>에 이바지하는 단순한 수단이나 재료로 취급하거나, 양자를 일 대 일로 대응시키려는 시도를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개인이나 동시에 가족이 사회적, 역사적, 경제적, 정치적 터전을 직접 제공한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정신분열자-분석은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가. 하나는 무의식을 표현하는 “의사-형태”들을 파괴하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욕망에 의한 사회터전의 무의식적 공급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사회체 이전인 “욕망의 임플렉스”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아버지나 외조부의 이름에 포개지지 않고, 오히려 이 후자가 역사상의 모든 이름에 대해서 열려 있었다.”(256) 인종, 씨족, 결연과 부자관계의 행태 모두 역사적이고 집단적으로 표류하여 수천의 <흐름-절단> 속에 분쇄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은 이 모든 관계들을 기어코 <아버지의 상징적 공허>에 쑤셔넣고 의미를 연역하려고 했다.
오이디푸스는 삼각형 내부로 끌어들이고 폐쇄하려고 하는 “식민지화”이다. 그것은 “내부의 식민지”이다. (260) 오이디푸스는 분명히 전통적인 규범을 생산하고 있으며, <존재의 고칠 수 없는 결함>과 보편적 거세를 알려주겠다고 말한다. 오이디푸스화는 피식민자를 끌어들여 삼각형을 닫으려 하고, 피식민자는 오이디푸스에 저항한다. 만약에 오이디푸스가 보편적이라고 말한다면 세계에 존재하는 식민지화를 긍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은 아버지의 상징적 결여, 위대한 시니피앙의 재등장”은 우리 사회의 긴 역사를 이루고 있다. <욕망되고 있는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 그리고 그것에 대한 <억압-억제>의 효과가 ‘오이디푸스’의 심상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억제되기는커녕 더욱 견고해진다. 여기에서 억제되는 것은 ‘욕망하는 생산’이다.
토지의 표상은 “억제되는 표상표현”, “억제하는 표상작용”, “옮겨 놓아진 표상내용”이라고 하는 세 결정기관을 내포하고 있다. 이 과정을 다섯 가지의 <극한>으로 볼 수 있다. 첫째로 욕망하는 생산은 사회적 생산의 극한에 있다. 탈규준화한 흐름들은 규준들의 극한에 또 토지들의 극한에 있으며, ‘기관들 없는 신체’는 사회체의 극한에 있다. 이것을 <절대적 극한>이라고 한다. 기관들 없는 신체란 탈토지화한 사회체요, 욕망의 탈규준화한 흐름들이 흐르는 광야요, 세계의 종말, 황량한 풍경이다. 둘째로 <상대적 극한>은 자본주의적 사회조직체이다. 왜냐하면 이 조직체는 실제로 탈규준화한 흐름들을 기계로서 조작하고 흐르게 하되, 규준들을 더욱 압제적인 계량화적 공리계로 대체하기 때문이다. 정신분열증은 절대적 극한이지만, 자본주의는 상대적 극한이다. 셋째로 사회조직체에서 볼 수 있는 <현실적 극한>이다. 사회조직체에 극한이 들이닥치려 하면 사회조직체는 전력을 다하여 이를 쫓아버린다. 넷째로 내부에서는 억압받은 이 극한이 이미 근원적인 발단, 즉 신화적 자궁에서는 <상징적 극한>으로서 투사되어 있다. 상징적 극한은 규준화되지 않은 흐름들이 용암처럼 흘러 들어와 사회체를 침범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섯째는 극한을 자연상태(이쪽)에서 사회체(저쪽)로 옮겨놓는 일의 중요성이 생긴다. ‘결연의 표상작용’과 ‘부자관계의 표상표현’ 사이의 중간에 이행시키는 것이다. 바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이 <옮겨놓아진 극한>이다. (267-268)
무의식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그 대신, 무의식은 기계들을 이루는데, 이 기계들은 욕망의 기계들이요, 정신분열자-분석은 이 기계들이 사회기계들 속에 내재하면서 어떻게 사용되고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발견한다. 무의식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다만 기계로서 작동한다. 그것은 표현하는 것도 아니요 표상하는 것도 아니라, 다만 생산하는 것이다. 상징은 오로지, 욕망하는 기계로서 작동하는 하나의 사회기계요, 사회기계 속에서 작동하는 욕망하는 기계이며, 욕망에 의한 사회기계의 공급이다. (273)
사회체는 시니피앙의 연쇄들에서 의미를 채취하여 고정된 기능으로 사용한다. 따라서 사회체의 본질은 교환이 아니라 의미의 채취와 고정, 규범화다. 생물학-우주적인 기억을 억제하고 ‘신체에 표시를 하는 것’, ‘맨 살에 기억을 새겨넣는’ 잔인한 행동들이 사회체의 역할이자 본질이다. ‘오이디푸스’는 이러한 사회체의 잔인한 역할을 보조, 강화하는 이념을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