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이해는 사람들의 인연을 어디까지 밀어붙이게 될까.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는 한 때 한 시절을 공유했던 두 친구가 자신의 감정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접하고, 결국 자신의 방식으로 이해하게 되는 과정을 다룬다. 두 사람의 이야기에는 서로 겹치지 못하는 두 가지의 서사가 진행된다. 이 두 가지의 서사, 두 가지의 감정이 얽히고설키고, 낯선 이방의 무드가 합쳐져 영화의 특수한 분위기가 발산된다. 여기에서는 투박하게 두 가지의 서사를 정리하고자 한다.
① 해성
해성은 12살의 어린 나이에 성숙한 정신을 가졌다. 울보 나영을 매일같이 위로하며 마음으로 그를 사랑한다. 하지만 해성 그 스스로도 자신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영이 친구들에게 과시하며 하는 이야기를 엿들으면서, 나영이 자신과의 관계보다도 성공과 욕망에 관심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나영은 이민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해성을 좋아한다는 것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다. 그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솔직하지 못함은 해성에게 상처를 남기고, '제대로 된 이별 인사'를 생략하게 된다.
이 '제대로 된 이별 인사'가 생략되는 바람에 해성의 마음에는 오묘한 미련이 남는다. 12년 후, 평범한 한국 남성이 그렇듯 군인이 된 해성은 자신의 비참한 상황 안에서 나영을 기억해 낸다. 지속적인 기억은 아니었을지 모른다. 마음 한편에 남아 있던 미련 같은 것들이 그 당시 나영의 감정을 확인하고 싶다는 욕구를 만들었을지 모른다.
해성은 영상통화를 통해 만난 나영에게 반가움을 드러내지만, 나영에게 그녀를 왜 찾았는지는 솔직하게 말하지 못한다. 그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영이 있는 뉴욕에 찾아갈 만큼의 적극성을 보이지도 않는다. "내가 뉴욕에 왜 가"라는 무심한 말은 나영이 "내가 서울에 왜 가"라는 말이 되어 돌아온다.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고 다시 12년이 흐른다.
해성은 나영과 그의 남편을 만나기 위해 휴가를 얻어 뉴욕에 온다. 해성은 나영을 만나 감정을 직면하고, 이제야 진짜 이별을 맞게 된다. "야, 잘 가라"하고 투박하게 던졌던 인사는, 이제야 마무리된다. "이번 생애는 그럴 인연이 아닌 거야. 이생에서는 아서인 거지. 8천 겹의 인연이 있는 사람. 우리는 왕비와 왕의 부하 정도였을지도 모르지." "이것도 전생이라면 벌써 서로에게 다른 인연이 아닐까? 그땐 우린 누굴까? 그때 보자."는 해성이 나영과 자신의 관계를 완벽하게 정리하는 이별의 이야기이다.
② 나영, 그리고 노라
해성과 달리 계단 위에 살던 나영과 그의 가족은 목표지향적이며, 더 나은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관을 지니고 있다. 사랑보다는 성공을 추구하는 바람에 '아메리칸드림'을 꿈꾸고 캐나다로 이민을 간다. 부모의 가치관을 내면화 한 나영은 자신이 좋아하는 해성에게도 진정한 이별을 인사하지 않는다. 그냥 막연히 언젠간 결혼하지 않을까? 하는 12살 특유의 무신경한 생각을 가지고 떠나가는 사람이 된다.
12년 후 뉴욕에서 인정받는 작가가 되기 위해 습작을 하던 나영은 해성을 기억하지도 못한다. 하지만 해성이 이미 자신을 찾고 있었다는 사실에 들뜬다. 해성이 보고 싶었다고 말하자, 자기도 보고 싶었다고 거짓된 진술을 한다. 몇 달에 걸친 영상통화는 두 사람을 가깝게 만들고, 감정적으로 요동치게 만든다. 나영은 자신이 두고 온 것들에 대한 그리움을 느낀다. 하지만 해성의 몇몇 말에 상처를 받고, 다시 자신의 목표 달성을 향하기 위해 떠나가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자신의 환경에 맞는 남자 아서를 만나 뉴욕에 정착한다.
다시 12년 후 아서는 노라가 추구한 미래가 자신이라는 사실에 실망하지는 않냐고 묻는다. 아서는 노라를 너무나도 잘 아는 사람이 되어 있다. 해성은 노라를 만나고 나서야 자신이 놓지 못한 것이 자신의 인연이 아니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정작 노라는 자신이 포기해야만 했던 것이 자신이 잊고 있던 무언가였음을 진정으로 깨닫는다. 해성의 작별 인사를 듣고 나서야 실감을 한 노라는 다시 울보 나영으로 돌아온다. 그걸 또 바로 이해하고 받아주는 건 아서다. 나영만 자신의 마음을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닐까. 노라의 깨달음은 지금껏 그 자신이 잊고 있었던 자신의 복합적인 정체성의 깨달음으로 떠오른다.
노라라는 이름은 아버지가 레오노르라는 이름에서 따서 만들어준 이름이다. 해성의 해석에 의하면 15세기 이베리아 반도 나바르 왕국의 여왕의 이름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해성과 노라는 해성의 해석대로 연인이 아닌 다른 인연이었을 수 있다는 점이 이 영화의 복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영화가 해외 여러 작품상에서 노미네이트 되고, 수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영화의 수사방식과 복합적인 감정선에 있을 수도 있겠지만, 미국에서 살아가는 동양 이민자의 심상을 알아보고자 하는 또 다른 오리엔탈리즘이 작동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