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이렇게 엉망일 수가 있나"
영화를 처음보고 가장 먼저 떠오른 말이었다. 영화가 엉망이라는 게 아니라 <콘클라베>에서 묘사한 서사들에 등장한 인물들이 엉망진창이라는 의미였다. '노인들의 가십걸'이라느니, '추기경들의 조별과제'라느니 하는 여러 소문들은 들어서 예상은 하고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봐도 '엉망진창'이라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는 영화였다. 오히려 등장인물들이 너무 인간적이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차라리 우리 동네 신부님들을 모아 콘클라베를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전 세계 신자를 대표해야 하는 교황 후보라는 사람들이 극단주의자, 인종차별주의자, 성폭행범, 권위주의자, 독단주의자에 인터섹스라니. 이쯤 되자 여러 신부님들의 증언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이 영화는 더 이상 리얼리즘을 주제로 만들어진 영화는 아니겠다는 확신이 생긴다.
-"콘클라베"라는 제도의 폐쇄성
다시 말하면 영화 <콘클라베>(2025)는 "콘클라베"라는 특정한 시공간성을 배경으로 알레고리화 된 인물들을 넣어 만든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콘클라베는 선임 교황의 직무가 정지되었을 때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는 선거 의식을 의미한다. 즉 콘클라베는 그 자체로 추기경들의 내밀한 투표를 의미한다. 신앙 공동체와 결속성, 그리스도인들이 공유하는 고유성, 단일성을 의미함과 동시에 시간적으로 그리스도교 교회의 진공상태, 폐쇄된 공간의 속성을 상징하게 된다. 콘클라베는 그리스도교 그 자체의 특성을 대표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시간이 멈춘 상태. 이 상태는 곧 그리스도교 자체의 자기 성찰의 시간,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 방법을 성찰하는 상태라고도 할 수 있다.
-인물들의 알레고리화
이 영화에 등장하는 추기경들, 특히 교황의 후보자라고 소개되는 인물들은 특정된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 마치 관념이 인물로 묘사된 것만 같은 확정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인물들은 과거의 그리스도교를 이끌었던 관념의 집합체이자 상징으로 보인다. 바흐친에 따르면 인물의 은유화는 모든 인간성을 대표해서 규범이 드러나도록 하는 하나의 극단으로 이용될 수 있다. 특헤 벨리니, 트랑블레, 아데예미 추기경, 아녜스 수녀는 하나의 집단, 혹은 하나의 이념, 하나의 관념을 의인화한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콘클라베를 둘러싼 환경과 사람들
'콘클라베'는 아이러니하게도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폐쇄된 공간에서 이루어진 내밀하고도 고유한 투표라는 의미를 지닌 콘클라베는 그 시작점부터 어긋나버린다. 로렌스 추기경은 교황 후보들의 자격을 검증하기 위해 외부의 정보를 필요로 하며, 추기경들 스스로도 그리스도교의 도그마를 해체하는 행동을 스스로 저질러 버린다. 인물들이나 환경 역시 마찬가지이다. 수녀는 없는 듯이 존재하지만 모든 것을 보는 사람이자, 많은 것을 숨기고 조종하는 사람이다. 카메라는 콘클라베 밖에서 결과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나, 주변에서 벌어지는 내전과 분쟁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외면한다. 그러나 사실은 콘클라베가 모든 것에 영향을 받으며 공존하고 있다는 실재를 드러낸다. 특히 유명한 천장붕괴 씬은 가히 압도적으로 콘클라베의 고유성을 부순다. 이 장면이야말로 이 영화가 상징성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그리스도교를 향한 불신과 비판에 대해
신학자 토마시 할리크는 <그리스도교의 오후>에서 천주교의 위기에 대해 설명한다. 세계적으로 그리스도교는 성직자의 성적 학대와 관련된 추문으로 신뢰를 잃고 있으며 사제의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많은 신자/비신자에게 제대로 된 답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공산주의 치하 그리스도교 역할의 부재 혹은 소수자를 위한 정치적 역할을 하지 못하는 이중성, 남녀 평신도의 구분과 배제 등은 그리스도교의 역할과 존재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지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문제의 원인을 뿌리 깊은 성직주의, 승리주의, 교회의 권력지향적 태도에 있다고 보았다. 영화 <콘클라베>는 이러한 그리스도교의 의문에 대한 변혁의 요구를 조용하지만 매우 직접적으로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명료한 결말, 그리스도교의 길을 제안하다
이 영화에서는 교회의 건전한 균열, 완고한 성직주의의 붕괴, 새로운 교회로 나아갈 것을 명료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것도 은유화된 인물을 통해서 무척이나 간결하고도 정확하게 말이다. 바오로 사도는 '경건한 이방인'을 환영하는 것을 첫번째 개혁으로 언급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인터섹스인 베니테즈 추기경을 교황으로 선출하게 되는 결말은 그리스도교가 지닌 엄숙한 성직주의를 비판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새롭게 시작될 그리스도교 교회의 새로운 정체성을 그려내고 있기도 하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가장 반역적인 이야기를 하는 이 영화는 결국에는 그리스도교와 교회에 대한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한 개혁의 열망을 드러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