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발터 벤야민
발터 벤야민은 1892년에 베를린에서 태어나서 1920년대에 왕성하게 활동한 작가, 비평가이자 사상가이다. 그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의 사이에서 혼란을 겪었던 바이마르 시기에 주로 활동했다. 경제적․정치적 혼란 속에서 그는 자본주의적 근대화 과정과 전쟁을 몸소 체험하였고, 그 과정에서 사회를 변혁할 이론적 방법을 찾고자 했다. "유물론적 문화지형학"은 벤야민이 현실을 파악하고 실천적으로 변화를 추구하고자 했던 방법이다. 그는 아웃사이더 사회주의자의 위치를 고수하면서 끊임없이 고민한다.「독일비극의 원천」(1928),「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1935),「아케이드 프로젝트」등의 작품들은 위와 같은 발터 벤야민의 사상적 고민을 담고 있다. 저자는 이 논문에서 벤야민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두 가지 개념을 소개한다.
2. 문화의 "기능전환"
벤야민은 사회주의의 유물론적 입장에 서 있다. 유물론을 옹호하는 사회주의자들은 상부구조가 하부구조에 의해 결정된다는 의식을 견고하게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벤야민은 이들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고 상부구조의 문화가 거대담론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술적 생산력은 대중을 선동하고 전쟁에 동원하는 등 전체주의적으로 이용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벤야민은 기술적 생산력의 발달에서 오히려 긍정적인 전망을 발견한다. 기술적 생산력의 발달은 고착되어있는 기존체제를 폭파할 영향력을 가져오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술복제시대에 이르러 전통의 영역에서 아우라(Aura)를 벗겨낼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자본주의는 대중이 복제품을 쉽게 접하게 하여 전통을 현재화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복제품의 대량생산과 현재화는 전통을 뒤흔들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아가 프롤레타리아가 능동적으로 사고하고 사회구조 안에서 주체적으로 자립하여 부르주아를 위협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를 얻기도 했다.
벤야민이 주장한 '기능전환'은 예술형식이나 제도 등을 변형하여 전통적 의미와는 다른 의미로 전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기능전환'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준 사람으로 브레히트(Bertolt Brecht)를 언급한다. 브레히트는 연극은 배우와 관객이 일치되어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기존의 관념을 뒤엎는다. 전통적인 연극은 사회현실의 비극성을 독자가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는 반면, 브레히트의 연극은 사회의 모순과 문제를 관객이 파악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브레히트의 연극은 정치적인 의도가 담겨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벤야민과 브레히트는 사회적 생산관계 안에서 대중이 투철한 자기성찰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이러한 예술의 기능적 전환은 대중이 전체주의, 파시즘에 선동되고 이용되지 않게 하기 위한 장치이다. 따라서 지식인과 작가는 자신들의 저서가 전체주의에 의해 악용될 소지를 만들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스스로 성찰해야만 한다.
3. 모더니티와 신화의 변증법
막스 베버(Max Weber)는 현대를 주술적인 요소들이 사라진 합리성의 시공간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벤야민은 현대에서 "신화의 귀환"을 발견한다. 벤야민이 발견한 현대의 신화는 산업화로 인한 "진보의 신화"였다. 진보에 대한 믿음은 부르주아에서 프롤레타리아까지 모든 인간사회에서 형성되었고 대중의 일상 문화에 깊이 침투하였다. 세계 2차 대전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와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현대 사회의 신화를 분석하기도 하였다. 롤랑 바르트는 일상의 영역에서, 보드리야르는 기호를 통한 소비와 광고에서 신화적인 요소들을 발견하고 분석하였다. 이들은 모두 현대사회의 신화적 위력을 발견했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의의를 지닌다. 벤야민 또한 '신화'가 대중, 대도시와 상호연관을 지닌다고 생각하고 그 관계를 추적한다.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그러한 벤야민의 시도를 보여주는 노트이다. 벤야민은 상품을 생산하는 사회 현실 속에 신화가 존재하며, 대중은 신화에 현혹된다고 주장한다. 현대성의 신화는 상품, 건축물 등 인간의 창조물에서 발생하며 이것이 '현대의 우상'이 되는 것이다.
벤야민은 모더니티의 공간에서 '경험'을 잊어버리고 '충격을 체험'하면서 사람들이 만나게 되는 환영을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라고 한다. 이 단어는 아케이드나 백화점, 카페 등의 공간이나 상품에서 느끼게 되는 허구적 체험을 일컫는 말이다. 상품사회에서 겪는 반복적인 일들로 인해 사람들은 환등상을 보게 되며, 각 개인의 고유한 정신적 능력이 마비되는 것이다. 벤야민은『아케이드 프로젝트』를 통해 자본주의적 현대를 고대와 현대, 신화와 역사의 변증법적 이미지로 재현하고, 지금 이 순간에 신화에서 벗어나 각성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벤야민은 충격체험 또한 생산적으로 활용하려는 방법을 찾고자 한다. 먼저 문학적 몽타주 기법으로 충격체험을 흡수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아케이드 프로젝트』에 잘 드러난다. 문학적 몽타주 기법은 불규칙적으로 떠오르는 사유들을 비역사적인 서사 방법으로 기술하는 방식으로 상품사회의 기만을 폭로한다. 진보적 역사기술에서 버려진 폐허에서 잊혀진 기억을 찾아내는 방법이다. 두 번째는 상품사회가 강요하는 '체험'을 '경험'으로 능동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이는 보들레르의 서정시에서 잘 드러난다. 보들레르는 서정시인임에도 전원을 벗어나 도시를 대상으로 작품을 쓴다. 보들레르의 작품은 모더니티의 이면을 꿰뚫는 증인이 된다. 그는 화려한 "파리의 심장부에서 무력감을 느"꼈으며, 그 무력감이 "파리 시민에게 어떤 작용을 했는지 감지한 유일한 사람"이었다.세 번째는 충격체험을 겪은 현대인에 가장 적합한 예술형태로 사진과 영화를 언급한다. 그는 사진과 영화의 기술적 복제 가능성은 대중의 태도를 비판적이고 진보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4.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
벤야민에게 아케이드는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다. 먼저 그는 아케이드를 "상품물신"이라는 환상에 빠져있는 공간으로 보았다. 부르주아들이 아케이드, 세계박람회, 실내장식, 파노라마 등으로 도시를 신화적으로 꾸미고 대중을 현혹시킨다는 점에서 아케이드는 허구적이고 환상적인 장소다. 그러나 벤야민은 꿈으로 표상되는 아케이드 속에 버려진 잔해에서 소망과 유토피아적 이미지를 발견하기도 한다. 벤야민에게 잔해에서 발견한 비역사적 이미지들은 견고한 기존체제를 혁명적으로 해체할 수 있는 도구가 된다.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혁명적, 계몽주의적 의도를 품은 무기였다. 그런데 이러한 소망 이미지는 변증법적 이미지가 가하는 '충격'을 통해서 일깨울 수 있는 것이었다. 꿈과 폐허가 충돌하는 그 지점에서 진리를 포착하는 것을 '변증법적 이미지'라고 한다. 비역사적인 파편들 속에서 '위기의 순간'을 발견하고 혁명의 기회를 엿보는 것이다. 벤야민의 이러한 의도는 철학, 문학, 역사, 정치 등의 방면에서 다양하게 재해석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