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네그리, 정남영·박서현 옮김, <다중과 제국>, 갈무리, 2011.
써발턴 연구 그룹을 추적해봅시다. 여기서 역사 비판은 위로부터 역사 과정을 구축하는 서양 전통과의 발본적인 단절에서, 더 정확하게는 주변부의 역사나 식민지에 대한 유럽 중심적 중층결정이라는 서양 전통과의 발본적인 단절에서 시작합니다. 식민지의 역사 기술은 첫째로 유럽 식민주의의 시혜주의적 구도와 관련이 없는 요소들을 은폐하거나 신비화하는 역사 기술이었으며, 둘째로는 제국적 구성에 대한 반발을 배제하는 역사 기술, 다시 말하면 식민국가 자체가 투쟁에 대한 반응으로 구축되었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역사 기술이었습니다.(63)
불연속성. 역사적 발전 일반은 인과적 분석의 관점에서 볼 때, 결코 미리 주어지지 않으며 언제나 과정 안의 주체의 행위에 의존합니다. 그래서 주체의 행위 -만약 그것이 노동계급의 자율성에 연결된다면- 는 언제나 측정불가능한 행위입니다. ‘척도의 외부’에 있다는 의미의 그리고 또 ‘척도 너머’에 있다는 의미의 측정불가능함입니다. ~ ‘척도의 외부’와 ‘척도 너머’에 관한 이러한 논의는 우리의 방법론을 특징짓는 두 번째 중요한 문제입니다. ~ 이미 고전경제학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맑스주의에서 가치 개념은 역사 과정에 대한 인과적 설명의 핵심을 이루는 내적 규정을 구성했습니다. 사실 가치 개념이 가치법칙으로 표현될 때, 이는 그것이 노동 규정에 척도를 제공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제안하는, 자본관계에 대한 닫힌 파악으로부터 적대에 기반을 둔 열린 파악으로의 이행은 노동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모든 생산 과정과 모든 투쟁 과정의 핵심에서 확증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가치척도가 제거되며 발전의 균형이라는 기존의 관념이 제거되는 것입니다. (66-67)
역사적 시기구분을 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의 경우 우선 그것은 자본주의가 발전한 영역에서 어떻게 국민국가가 종식되는 데 이르렀는지를 정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본주의 발전을 시기별로 구분하는 것, 특히 자본주의가 거쳐 가는 다양한 국면들 중 최종적 단계, 제국적 단계를 특징짓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한편 방법론적 관점에서는 자본주의적 관계가 그 영역에서 일어나는 투쟁·충돌·대립과 관련하여 결정된다고, 다양한 형태로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사회적 투쟁의 관계는 제국 안에서 구체화되고 안정화됩니다. (67)
주권과 자본 (주권 개념과 자본 개념) 사이의 구분이 의심할 여지없이 크지만, 자본주의 발전이 이루어지면서 점차 두 개념 사이에 유비적 관계가 형성됨은 확실합니다. 사회가 자본에 포섭되는 바로 그만큼 (즉, 노동의 형식적 포섭에서 실질적 포섭으로 이행하는 만큼) 모든 사회적 관계는 어떤 의미에서 생산관계가 됩니다. 따라서 이때 주권 관계와 자본 관계는 어떤 방식으로든 중첩되게 됩니다. 실질적 포섭은 사회적인 것의 자본화를 의미합니다. 결국 착취의 중심이 직접적으로 사회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가치 법칙의 위기는, 그리고 그에 따른 착취와 수탈의 탈측정화는 명령의 직접성을 낳습니다. 그러므로 실질적 포섭의 시기에 명령은 착취 과정 외부에서 덧붙여지는 어떤 것이 아니며, 착취 과정을 직접적으로 조직하는 어떤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말할 때, 우리는 주권 개념과 자본 개념 사이의 임계적 동일성을, 혹은 적어도 일종의 심오한 상동성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75)
제국에서 주권적 권력의 불안정성은 이렇듯 그 정의(定義)의 일부이다. 탈근대의 불안정성은 사회와 연관된다기보다는 주권적 권력과 연관된다. 근대 유럽의 주권적 권력의 두 번째 양상은 주권과 대화할 수 있는 국민(people)의 창출을 핵심으로 한다. ~ 국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분자적 동학을 따르고 차이를 주장하며 교차와 혼종화를 실험하는 다중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으로 인해서 제국적 주권은 내전의 개념으로 열린다. ~ 그러므로 주권은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인 권력이며, 그것이 수많은 적대를 해소할 수 있으며 때때로 힘의 관계들의 시간적·공간적 해체에 개입할 수 있다는 가설 위에서 기능한다. (89)
착취가 무엇인지는 발전의 중단을 언급할 때 이미 보았는데, 이 발전의 중단은 절대적인 방식으로 -위기로서- 제시될 수 있거나, 아니면 세계시장에 대한 자본주의적 명령의, 언제나 다양하며 또 다양하게 기능하는 위계적 변조를 따라서 제시될 수 있습니다. (105)
삶권력은 거대한 구조와 기능을 지칭하는 데 쓰이며, 반대로 삶정치적 맥락 혹은 삶정치는 권력 관계, 권력 투쟁, 권력 산출이 전개되는 공간을 가리키는 데 쓰입니다. 우리는 국가 권력의 근원 혹은 원천에 대해 생각할 때, 또 가령 인구 통제의 관점에서 국가가 생산하는 특수한 테크놀로지에 대해 생각할 때 삶권력을 말하며, 저항의 복합체에 대해 생각할 때, 권력의 사회적 장치들이 충돌하는 경우들 및 그 정도에 대해 생각할 때 삶정치 혹은 삶정치적 맥락을 말합니다. ~ 허약한 삶정치가 복지의 사회적 실천에 맞서는 근본적인 무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 이러한 관점에서 삶정치는 계급투쟁의 확장입니다. (113)
대의도식이 언제나 불완전했으며 사실상 대체로 기만적이었다는 점을 말할 필요는 없다. 근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종종 대의 메커니즘에 대한 중요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선거란 다음 2년, 4년 혹은 6년 동안 국민을 잘못 대의할 지배 계급 성원을 선택하는 기회라고 말한다면 아마도 과장이겠지만, 분명 이 말에는 진실이 있으며, 낮은 투표율은 분명 선거 기구에 의거한 대의제도의 위기의 징후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대의가 더 본질적이고 발본적인 의미에서 침식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제국으로 이행하면서 국가공간은 그 정의(定義)를 상실하고 국가 경계는 상대화되며, 심지어는 국가와 연관된 상상적인 것들이 탈안정화된다. ~ 이런 상황에서는 대의의 불가능성이 더 분명해지며, 그리하여 국민 개념 자체가 증발하는 경향이 있다. (125)
우리는 초점을 국민(민중) 개념에서 다중 개념으로 이동시켜야만 한다. 다중은 계약론의 관점에서는 이해될 수 없으며, 일반적으로 초월론적 철학의 관점에서도 이해될 수 없다. 더 일반적인 의미에서 다중은 무한하고 측정불가능한 다양체이기 때문에 대의에 대한 도전이 된다. ~ 국민개념과 대조적으로 다중 개념은 특이한 다양체, 구체적 보편자이다. 국민은 사회적 신체를 구성하지만 다중은 그렇지 않다. 다중은 삶의 살이다. ~ 다중은 능동적인 사회적 행위자, 활동하는 다양체이다. 다중은 국민과 같은 통일체가 아니지만, 우리는 다중이 대중 및 군중과 달리 조직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 (권력은) 다중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이는 주체의 통일성(국민), 주체의 구성 형식(개인들 사이의 계약), 통치의 양태(분리되거나 결합된, 군주제·귀족제·민주제)의 연관이 파열됐기 때문이다. (130-131)
다중의 절대적 민주주의의 이러한 새로운 내용을 다룰 경우, 대항권력(counter-power) 개념이 우리에게 근본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것 같다.
대항권력 개념은 주로 저항, 반란, 구성권력이라는 세 요소로 구성된다. 하지만 지배적인 민주주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지배적인 대항권력 개념이 근대에 국가 공간과 국가 주권에 의해 정의되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133)
대항권력의 주된 질료는 살, 즉 신체적인 것과 지적인 것이 일치하고 또 구별불가능한 살아있는 공통된 실체이다. 모리스 메를로-뽕띠는 다음과 같이 썼다. “살은 물질도 아니고 정신도 아니며 실체도 아닌데, 그것을 나타내려면 ‘원소’라는 오래된 용어가 필요하다. ~ 이런 의미에서 살은 존재의 원소이다.” 살은 순수한 잠재성, 삶의 무형적 질료, 존재의 원소이다. 하지만 살을 벌거벗은 삶과 같은 개념과 혼동하지 않도록, 말하자면 그 모든 질적인 것을 벗은 형태의 삶, 삶의 부정적 한계와 혼동하지 않도록 유의해야만 한다.
다중 개념은 스피노자의 작업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정식화의 형태로 탄생하는데, 스피노자는 이 용어를 일정한 형태로 배열되어 있는 특이성들의 다양체로 이해합니다. 다중 개념이 스피노자 이전의 근대 정치사상에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존재했던 경우에는 부정적 특성을 띠었습니다. 다중개념은 본질적으로 질서가 결여되어 있는 다양한 주체들의 집단을 가리켰으며, 다중은 자신 안에 형성 원리를 포함하는 질료로서 제시되기보다는 형성되어야 할 단순한 질료로서 제시되었습니다. (145)
다양체의 조직화 및 민주주의의 문제를 제기할 때 스피노자는 내재론적 평면에서 그 문제를 제기합니다. 즉 다중이 스스로를 직접적으로 조직할 수 있는 방식을 묻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다중은 이전에는 없었던 것을 모두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출하는 개념입니다. 원인이 행위이자 과정으로 되며, 민주주의는 다중이 공통의지를 표현하는 형식인데, 공통의지는 외부를 갖지 않으며 전적으로 자율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절대적 의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146)
스피노자에게는 또한 또 다른 대단히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그 요소는 니체의 공헌을 경유하여 현대에 와서는 들뢰즈와 푸코의 철학 속에서 표현되었습니다. 이 요소는 바로, 주체성을 관계들의 총체의 산물로서 정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체를 정의할 때 그 정의를 형이상학적 요소 위에 정초할 가능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 이런 방식으로 주체는 전체와의 관계를 통하여 정의되는데, 그것은 주체가 관계 안에서만 존재하며, 오직 상호작용의 놀이에 의해서만 주체에게 사법적·정치적 자격이 생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48)
권력을 양도한 순간 개인들은 국민(신민), 즉 주권자가 승인한 권리의 담지자들의 총체가 됩니다. 그래서 국민 개념이 근대에 국가의 산물로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재산을 가진 시민들의 총체로서 이해된 국민은 (재산은 근본적 권리입니다.) 소유의 보장에 대한 대가로서 그들의 자유를 포기합니다. 그 전에는 절대적 자연권이었던 그들의 자유가 이제는 공적 권리(주체권)가 되는데, 즉 국가가 개인들의 자유의 정도와 한도를 국가 기구의 기능에 유용하며 소유 관계의 재생산에 유용한 만큼 보장하는 것입니다. (149)
다중은 동일성의 재발견도 아니고 차이에 대한 순수한 찬양도 아니며, 오히려 동일성과 차이를 넘어선 ‘공통성’이 존재할 수 있다는, 즉 ‘어떤 공통적인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인데, 이는 그것이 창조적 활동들의 증식으로, 다양한 연합적 관계들 혹은 형식들로 이해될 경우에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 다중은 특이성들의 총체인데, 사실 여기서 총체는 차이들의 공통성으로 간주되며, 특이성은 차이의 생산으로 인식됩니다. (153)
합의라는 이름 혹은 관념은 국민과 대의라는 이름 혹은 관념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합의는 충실지지이자 양도이며 대의자와의 동일시입니다. 합의 개념이 점점 더 소비개념과 동화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합의를 이렇게 보는 것은 새로운 정의의 문제를 제기하는데, 이는 대의의 극복 없이는 의미가 없습니다. 대의가 근대 주권을 위해 시민적 힘들을 양도하는 개념이고, 합의가 이 과정의 은유라면, 우리의 문제는 이와 달리 이 과정 안에서 다중의 표현에 정치적 형식을 부여하는 것, 주체의 생산적 활력과 자유를 양도하지 않는 그러한 정치적 형식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우리는 새로운 생각을 다듬어내야 하고 네트워크를 통해 형성되고 확장되는 협동의 장치를 분석해야 합니다. (154)
다중이 자신을 주권에 의해 극복될 수 없는 한계로서 느끼지 않고 단지 장애로서 이해하고 자신의 가치를 낮추며 과소평가합니다. 결국 다중은 오직 주권의 파괴를 통해서만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경우 다중은 주권을, 적을 과대평가합니다. 이렇게 되면 다중의 문제를 국가로부터 해방되는 것,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립하는 것이 됩니다. (157)
다중은 국가의 한계이지만 다중에게 국가는 장애일 뿐입니다. 이 모든 것은 대결을 발전시키고/발전시키거나 유지할 수 있고 힘에 대해 결정할 수 있는 타격세력의 존재를 필요로 합니다. (158)
주권의 한계는 명령하는 자와 복종하는 자 사이의 관계 자체에 있습니다. 다중의 힘의 핵심은 이 관계를 파괴하는 가능성에 있다기보다는 발본적인 부정을 통해서 이 관계를 공동화하고, 이 관계를 떠나고, 이 관계를 실패하게 하는 가능성에 있습니다. 다중은 관계의 부정입니다. 사실세계를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것은 다중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다중은 주권 관계의 한계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159-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