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언와트,『소설의 발생』서평
가라타니 고진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은 근대소설의 끝을 예견했다. 그들은 이미 근대소설의 출발점을 의식하고 있었기에 종언을 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소설의 발생과 소설의 종언이 공존하는 지금 이 시점에서 문학을 공부하는 우리들은 무엇을 보아야 할 것인가. 소설을 통해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일까. 근대소설의 종언은 어느 정도 수긍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근대가, 그리고 근대문학의 종언은 인정할 수가 없다. 근대의 종언은 내가 서 있는 기반을 뒤엎는 것이며 근대문학의 종언은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 자체를 무화(無化)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기반을 공고히 다지기 위해서라도 문학의 재건이랄까, 문학의 의미를 되살려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읽는『소설의 발생』은 내가 서 있는 지금-여기의 정체를 확인하는 수단이자, 미래의 문학의 방향을 예견하게 하는 하나의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
『소설의 발생』의 저자인 이언 와트(Ian Watt)는 20세기 영국의 영문학자로서 세계적 냉전시기에 이 책을 발간한다. 그야말로 근대성이 폭발적으로 분출했던 제2차세계대전 직후에 근대적 소설의 기원을 묻고 있는 것이다. 그 역시 자신보다 2세기 이전의 작가들, 다니엘 디포우와 사무엘 리처드슨, 헨리 필딩을 통해서 자기세대의 기반을 찾고자 한다. 그가 이 세 작가를 통해서 얻은 키워드는 다음과 같다. 형식적 리얼리즘, 독서 대중의 형성, 인쇄 자본주의, 개인주의, 도덕윤리(가정과 여성), 도시화와 교외의 형성, 서간문 형식의 정착 등이다. 키워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소설의 형식․내용 이외에도 근대화 자체가 내재하고 있는 외부적 요인이 다수를 차지한다. 다시 말해 근대소설의 기원은 역사․사회․문화적인 요인에 맡겨져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가의 독창성이나 천재성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사회적 변화를 예리하게 포착하고 시대변화에 발 빠르게 움직인 작가의 경향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다만 디포우가 작품창작을 할 때 보수의 정도를 계산하면서 글을 썼다는 서술(83)등을 통해서 경제구조의 변화가 작가와 그의 창작물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언 와트가 지적한 몇 개의 키워드를 따라 그가 포착한 근대소설의 기원요소를 다시한번 파악하고 지금-여기에서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근대소설은 리얼리즘을 추구하면서 등장한다. 그런데 18세기에 새로운 세대였던 다니엘 디포우와 사무엘 리처드슨, 헨리 필딩이 보여주는 리얼리즘은 이전의 것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그들은 인간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방식이 아니라 세계를 자신이 직접 경험하는 듯한 느낌을 전해주는 것이다. 이때 리얼리즘은 "미디어"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된다. 어떠한 미디어를 접하느냐에 따라 같은 대상을 다른 느낌으로 접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리얼'진실이라는 것은 더 이상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좀 더 특수한 것이 된다. 그리하여 소설은 '형식적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개인적인 양식의 글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형식적 리얼리즘을 통해서 개인적인 것과 그러한 개인적인 것을 형상하는 방식이 부각된다. 개인적인 소설을 언급하기 위해서는 디포우의『로빈슨 크루소』와『몰 플렌더스』를, 개인적인 것의 형상방식으로 리처드슨의『클레리사』를 들고 있다.
디포우, 리처드슨, 필딩은 독자에게 시간과 공간에 대한 근대적 감각을 제시하는 방법으로 묘사기법과 인쇄기술을 이용한다. 먼저 디포우와 리처드슨은 사건이 일어나는 시간과 공간을 불필요할 정도로 꼼꼼히 기술하여 독자들이 사소한 움직임이나 배경, 시간적 감각을 공유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독자 스스로가 그 사건에 속해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얻게 한다. 필딩은 세부적인 묘사보다 달력이나 지형도, 지도와 같은 사건의 증거들을 실제로 존재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제시한다. 그리하여 디포우와 리처드슨과 같은 실제와 같은 현실성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시간과 공간의 균질화라는 근대적인 감각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독자에게 선사해줄 수 있었던 것이다.
개인주의적 감각을 극대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서간문 형식이 소설이 등장하기도 한다. 디포우의『몰 플랜더스』도 그렇지만 리처드슨의『클레리사』는 거의 완전히 편지 형식으로 서사를 이끌어가기 때문에 전적으로 개인의 고백에서 모든 사건의 단서를 얻을 수 있다. 편지현식의 글은 타인의 편지나 일기를 몰래 읽는 듯한 느낌, 타인의 사생활을 엿보는 느낌을 준다. 그리하여 더욱 사실같은 느낌을 줌으로써 낭만적 열망을 리얼리즘적으로 충족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삶의 가장 비밀스러운 장소를 드러내"면서 독자에게 "직접 경험하는 것 같은 성경험과 사춘기 소망 충족을 전달하는 인기 매체"(298)로 소설이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감각들은 인쇄자본주의로 인해 발달된 것이었으며 책과 신문 등의 매체를 통해 익명의 공동체에게 전달이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일군의 공동체에게 전달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소설은 개인적인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소설은 개인이 혼자서 읽는 것이며, 소설 속의 주인공이 겪는 사건을 추체험하는 장르이다. 이는 18세기 이후에 전통과의 단절을 이야기하며 등장한 개인주의와도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근대 산업주의의 발생과 청교도주의 발생으로 인하여 산업계급, 상업계급은 경제적인 여유를 지니게 되면서 소설의 주요 독자층이 되는데, 작가들은 이들 독자층을 겨냥하여 경제적 개인주의를 대변하는 주인공들을 만들어 내었다. 이언 와트는 디포우의 『로빈슨 크루소』에 나타나는 계약관계, 경제관념, 상품가치, 노동분업 현상과 그에 따른 불안감 모두를 경제적 개인주의를 상징하는 요소들이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요소들은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기회를 얻을 수 있는 도덕적 민주화를 가져오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와 사회 발전의 세속화, 탈성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18세기 소설의 개인주의는 자연스럽게 낭만적 사랑의 내용을 담게 된다. 낭만적 사랑은 여성과 남성 모두의 주체성을 전제로 한 것이며 봉건적 가족의 영향이 없이 대등한 입장에서 감정의 교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낭만적 사랑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여성의 성적, 경제적, 사회적 자유가 밑바탕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18세기에 여성의 완전한 독립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하지만 일면적으로라도 여성의 주체적인 성격이나 주장, 삶 등의 등장은 소설의 내용적, 형식적 측면의 변화에 일조했다.
이러한 변화들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것이 아니라 사회, 경제, 문화의 변화로 인해 자본주의적 중산층이 등장하였으며 이들이 대중독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대중독자들은 그들의 욕망을 소설을 통해 충족하기를 바랐으며, 그들이 살고 있는 근대적인 체험들을 소설을 통해 더욱 강렬하게 얻기를 바란 것이었다. 그리하여 도시화와 교외의 등장, 개인적이고 내밀한 공간의 체험, 봉건제도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여성과 다시 억압하는 사회구조 모두가 소설의 영역에 포함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근대적 문학으로 등장했던 18세기의 소설은 21세기가 된 지금까지 그 영향력을 펼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소설의 영향력이 유효한 것일까 되물어보게 된다. 우리의 주변 어디에도 소설로 인해 인생이 바뀌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 그만큼 좋은 소설이 등장하지 않는 탓일까, 아니면 소설이 우리의 인생에 침투하기에는 삶의 리듬이 확연하게 바뀌어 버린 탓일까. 이언 와트가 지적했던 몇 가지 사실들, 독서대중의 등장이라든가, 감각, 윤리 등은 18세기의 그것과는 또 달라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실 이러한 지적은 일찌감치 있었고, 그 대안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대안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미디어의 변화, 체험의 변화만을 추구하다보니 의미 없는 변화만이 횡행하고 있다. 매체가 변화한 것은 사실이다. 인터넷, PMP, 심지어는 휴대폰을 이용해서 소설을 읽는 세대가 등장했으며, 소설보다는 더욱 직접적인 매체를 이용해서 이야기와 지식을 얻는 세대가 등장했다. 이는 18세기의 그것과도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세대의 감각을 쫓으려고만 해서도 안 된다. 그 세대가 지니고 있는 감각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쫓아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새롭게 등장한 대중지성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어떠한 삶을 요구하는 것인지 귀 기울여야 한다. 다시 보편적 진실 찾기에 임해야 하는 것이다. 보편적 진실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보편적인 진실이라는 것이 있을 리 만무하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적어도 책임을 지려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 사회가 지고 있는 문제들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책임(responsible)은 즉 응답하는 것(respond)이다. 우리 사회가 던지는 질문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형식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사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대답해야만 한다. 그것이 새로운 문학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요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