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열
기독교를 비판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비판하는 사람들 중에는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 뭐 그런 것들과는 상관 없이 어떤 면에서는 인정하는 편이다. 그들 대부분은 기독교가 지니는 폭력적이고 위선적인 면들을 지적하고 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권력이 기독교라는 이름을 내세워서 타국을 점령하려고 하는 야욕을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은 기독교라는 이름을 내세운 사이비 신앙이라고밖에 할 수가 없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에게도 얼마든지 내재될 수 있는 요소이기 때문에 그것을 경계하려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그것은 종교의 정곡을 찌르는 비판은 아니다.
기독교를 이용하는 정치권력이나 그 외의 것을 비판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체주의나 민족주의와 결탁한 종교를 비판하는 것 뿐이지, 종교 자체가 지니는 모순점을 짚어낸 것은 아니다.
기독교의 본질적 모순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 사람이 니체가 아닐까 싶다.
전체 기독교의 교리는 내가 잘 모르겠고, 적어도 내가 속해 있는,
천주교 교회에서 가장 으뜸 가는 교리는 사랑도, 부활도, 평화도 아닌
구원이다. (처음 그 사실을 알고 얼마나 식겁했던지...)
이 세상에서 얻지 못한 평화를 죽음 이후에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단 그것에는 조건이 붙는다. 신을 자신의 주인으로 섬기는 것.
즉 자신의 삶을 온전히 주인에게 바쳐서 자신이 온전히 구원받아 마땅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천국은 '이 세계'가 아니라 오로지 '저 세계'에 있다는 교리를 통해 삶의 행복을 지속적으로 유예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삶의 고통은 이 생에서 저지른 죄악의 결과물이며, 회개하고 반성해야만 천국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니체는 우리의 행복을 미루어서 다음 생애의 행복을 기대하게하는 기독교의 정신을 비판한다.
우리의 '삶을 배신하는 삶'을 살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배신까지 하게 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의 행복한 삶을 인정하지 않고 고통을 숙명으로 알고 살아갈 때, 인간은 얼마나 모순적으로 살게 될 것인가. 절대로 이것은 쾌락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 방법을 스스로, 주체적으로 찾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계속 성당에 머물러 있는 것은, 적어도 이 사람들은 자신을 반성하려고 한다는 사실에 있다. 실제로 이 사회에 들어와서 보면 자신의 삶을 온전히 버리고 고통을 선택하지 않는다. 구원을 저 세상의 것에 두지 않고, 이 세상에서 찾는다. 그리고 적어도 자기 자신만을 위한 욕심에서 그치지 않는다. 적어도 성당 안에서는 그러하다. 자신의 삶이 전부인 줄 알고, 반성 없이 사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아서이다.
그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또 다른 가치이기도 하다.
기독교가 지닌 모순점, 그리고 그것이 극복해야 할 대상이 무엇인줄 안다. 나의 목표 중 하나는 그 모순점에 균열을 내는 것이다. 모든 것이 선하고 아름답다는 인식을 깨뜨려야 그 뒤에 숨겨져 있는 모순덩어리가 발견될 것이다.
뭐 이런저런 두서 없는 말이 되고야 말았지만,
나는 기독교를 찬성하면서 반대한다. 반대하면서도 찬성한다.
균열을 낼 것이다.
이 다짐은 유예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