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혜정, <날아라 금빛 날개를 타고> 에세이
<생명과 혁명, 관련성에 대한 미학>
1. 인간
누군가 인간이 가장 강했던 순간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필자는 주저 없이 고통을 극복해 내었을 때라 말할 것이다. 그 중에서도 여러 자유를 억압하는 사회의 틀을 깨어버린 사람을 기억해 낼 것이다. 자신을 가두고 있던 것을 깨버리는 행위는 ‘혁명’이다. 그것이 역사적으로 기록될만한 큰 사건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오히려 규모가 작지만 자신을 극복한 사례를 혁명이라고 부르고 싶다. 강한 압력은 그에 합당한 폭발을 동행한다. 따라서 갇혀있는 것들은 분출의 대상이다. 그러나 인간이 각성하는 데에는 그만한 동기가 주어진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이는 혁명이 일어날 수 없다. 예수가 그러했듯이, 체 게바라가 그러했듯이 인간의 존재, 생명에 대한 존재감이 혁명을 불러오는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마음이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의지로 표출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혁명으로 발생된다. 따라서 사랑하는 순간이 인간을 가장 강하게 만든다고 할 수 있다.
역사로만 인지되었던 사건이 단지 사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문제였다고 한다면 같은 사건이더라도 대하는 시각이 달라질 것이다. 개인의 의지나 신념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는 전제에 동의한다면 이 또한 혁명의 선상에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현 정부는 종군위안부 문제를 흘러간 역사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한다. 피해자들이 세상을 떠나면 그 사건도 조용히 해결될 것이라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역사가 그저 흘러가는 것, 과거의 일이라고 한다면 그 사건은 이미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시각에는 중요한 점이 배제되어 있다. 바로 한 사람의 신념이고 그에 대한 사랑이다. 인간의 의지와 신념이 무참히 짓밟혔을 때의 상황을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일본이라는 한 국가에 대한 적대감을 초월하는 인간의 문제에 봉착한다. 그들이 겪었던 사실을 외면한다고 해서 자유로워질 수는 없을 것이다.
2. 女性
여성은 오랜 기간동안 남성의 욕구충족의 수단으로 여겨졌다.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인격을 지녔다는 것을 외면한 채로 역사는 흘러왔다. 아랫도리. 한 사람이 사람의 인격이 아닌 아랫도리만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시대. 마당순이는 달거리를 시작하면서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깨닫는다. 외딴 섬나라에 부당하게 팔려와 인간적인 취급을 받지 못했던 자신이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기쁨을 느낀다. 자신이 엄마가 된다는 가능성, 생명을 탄생하게 하는 데에 참여할 수 있다는 기쁨은 여성의 능력으로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내재된 생명의 존재를 깨닫게 했기 때문에 얻어진 것이었다. 그 희망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번져나간다. 자신이 만든 목각인형을 보며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림은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의 존재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마당순이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순이의 오빠로 밝혀진 소오세키에게도, 어머니가 없던 달래에게도, 영순 언니에게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담겨있다. 이는 ‘어머니’가 낮선 섬에서 자기 생명력을 상실한 조선인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존재임을 드러낸다. ‘사랑할 능력을 잃어버린’ 마당순이는 좌절한다. 할머니가 알려준 ‘향기로운 꽃길’이 자신에게는 사라져버린 지 오래라는 사실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소중한 존재로 이끌 수 있었던 생명력을 잃었다. 제국주의의 폭력이 남성성으로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여성으로서의 나약함은 국가의 나약함과 나란히 놓여졌다. 그것은 개인의 나약함이 아니라 개인을 비참하게 만드는 사회의 나약함이었다. 전쟁 후 위안부의 여성들은 여성으로서의 가치를 잃은 존재일 뿐이었다. 달래깨비처럼 연약한 존재여도 어디서든 꿋꿋이 일어서겠다는 의지를 가졌던 사람들은 모두 현실의 비극에 좌절한다.
3. 역사
지금 우리는 병사들 앞에 누운 덕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처럼 그녀들을 외면하고 있다. 마치 우리의 일이 아닌 것처럼, 우리의 축제에 방해가 되는 것처럼 외면한다. 당시의 제국주의가 만들어낸 현실이지만 고통을 외면하는 우리의 모습은 그들보다 낫다고 말할 수 없다. 일본은 전쟁에 종군 위안부라는 끔찍한 제도를 만들어 내었다. 인간을 인간답게 대하지 않는 수단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일본에 대한 적대감이나 증오심으로 분출한다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이것은 국가를 떠나서 인간 본연의 문제이고, 그 상황을 체험한 사람들의 생명과 신념의 문제이다. 한국이 외국인 노동자에게 가하는 착취나, 미국이 경제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벌이는 전쟁도 이와 마찬가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인간 본연의 문제를 말하기 위해 소설이라는 장르를 선택했으리라 생각된다.
오마당순은 생명에 대한 갈망으로 고통을 이겨낸다. “생명이 있는 것은 저마다 다 소중한거야” 라는 할머니의 말이 마당순이의 삶에 봄비 같이 다가온다. 오마당순은 세계-내-존재로서 글 안에 존재한다. 자의든 타의든, 세계에 의해 영향을 받았으며 그 또한 세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존재가 왜 현재의 우리들에게 충격을 주는 것일까? 현실을 아무리 외면한다고 해도 진실은 피할 수 없다. 현재의 우리가 외면하지 않고 당시를 살아갔던 사람들을 이해한다면 사랑할 수 있다. 관심을 갖고, 알아가고, 이해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고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사람이 사라진다고 해서 신념 또한 사라지지 않는다. 이제 위에서 언급했던 물음에 대해 답을 할 필요가 있겠다. 과거는 현재와 함께 변화한다. 현재의 우리가 그들의 신념을 외면하지 않고 존중한다면 시간은 결코 중요하지 않다. 그들에 대한 사랑을 우리 안에 담을 때 그것이 바로 혁명이고 변화가 되는 것이다. 겉으로만 자유로워 보이는 지금의 삶에서 바르게 아는 것, 자유롭게 상상하는 것은 대단히 개혁적인 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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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 4학년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