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타니 고진, <풍경의 발견> 발제
저자는 일본의 근대문학작가인 나쓰메 소세키가 품었던 의문, 즉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되물으며 글을 시작한다. 나쓰메 소세키는 문학이 “역사적인 것이라는 것, 그뿐만 아니라 그 역사성(起源) 자체를 은폐”(19)하면서 탄생하였다고 지적한다. 미셸 푸코는 ‘문학’을 계보학적으로 추적하면서, 근대적 의미에서의 ‘문학’이란 19세기에 성립한 장르라고 언급하였다. 물론 문학이 19세기 이전부터 존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푸코나 소세키가 언급하는 ‘문학’이라는 개념은 이전의 고전문학(한문학)과는 구별되는, 특수한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는 ‘문학’이라는 개념의 역사적 성격을 은폐하고 인간의 시원부터 존재해왔다는 점, ‘보편적인 것’임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역사적’이라는 단어는 어떠한 개념이 특정 계기를 거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는 ‘선험적’이라는 말과 대비되며 자명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대상을 의심할 수 있도록 하는 의식구조를 의미한다.
영문학도였던 나쓰메 소세키는 ‘문학’이란 것이 원래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것인가를 물을 수밖에 없었다. 일본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영문학’ 또는 ‘문학’이라는 장르가 영국인들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영국유학 도중에 이러한 의문을 품게 된 소세키는 영문학을 자명한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으로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서양의 문학과 일본의 문학의 차이가 질적인 차이가 아니라 각자 다른 특성을 지닌 것이다. 서양의 문학이 우월하고 일본의 문학이 서양의 문학을 목표로 하여 쫓아야 한다는 생각은 선형적이고 역사주의적인 사고에 입각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연속된 발전’, 낡은 것보다 새 것이 우월하다는 생각은 폐단이라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그는 낭만주의와 자연주의는 문학사를 역사주의적으로 해석하려는 과정에서 등장한 형식적인 사고방식이라고 지적한다. 낭만주의 시대가 끝나고 자연주의가 도래한다는 식의 선형적인 사고방식에 입각해서는 그 사이에 있는 무수한 변화를 읽어낼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작품의 어떤 부분이 낭만적 취향이며, 자연파 취향이라고 정확하게 짚어낼 수 있을 때에야 선형적인 폐단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나쓰메 소세키는 역사주의적이고 선형적인 사고방식, 모든 것을 자명하고 보편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 전체에 의문을 가졌던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와 저자가 함께 ‘문학’은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문학’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을 때, ‘문학’이라는 장르가 지니고 있는 숨겨진 이데올로기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문학’이 지니는 이데올로기를 벗겨내기 위해서는 근대적 ‘문학’과 전통적 ‘문학’을 직접적으로 비교해야 한다. 나쓰메 소세키는 우연히도 전통문학이 근대문학으로 옮겨가던 시기에 서 있었던 것이다. 전통문학에서 근대문학으로의 이행을 한 마디로 축약하자면 ‘풍경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문학, 한문학에서 풍경의 묘사는 대상을 그 자체로 보지 않고 가치나 관념으로 해석하였다.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선험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전통적 문학에서 풍경은 하나의 세계관을 의미했다. 그래서 그들은 풍경을 ‘묘사’하지 못하고 추상적인 관념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근대문학에 이르러서는 풍경을 풍경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인식하게 된다. 원근법의 등장이 바로 그러한 사실을 증명한다.
“풍경이란 하나의 인식틀이며, 일단 풍경이 생기면 곧 그 기원은 은폐된다.” 그렇다면 ‘풍경’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인식의 틀이며, 그것들은 왜, 무엇을 은폐하는가. 저자는 이 지점에서 일본 메이지 시대의 소설가인 구니키다 돗포의 소설을 인용한다. 구니키다 돗포는 ‘풍경’을 처음으로 묘사한 작가로 소개되고 있다. 구니키다 돗포는 자신의 소설에서 풍경과 인간을 묘사한다. 이전에는 추상적인 관념을 바탕으로 풍경을 바라보고 해석했다면, 이제는 모든 풍경과 인간의 외형 자체만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 안에는 어떠한 해석도 개입되어 있지 않다. 풍경과 인간의 묘사 자체가 주제일 뿐이다. 저자는 구니키다 돗포의 소설이 ‘인간’ 자체를 풍경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본다. 인간이 지니는 생각이나 관념, 특정한 가치관은 전혀 배제한 인간이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풍경은 이렇듯이 배경을 더 이상은 관념이나 이념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있을 때에, 선험적인 모든 것을 벗겨버리고 대상 그 자체를 바라볼 수 있을 때에야말로 등장한다. 선험적인 모든 것을 벗겨버리는 이 과정을 인식의 지각양태의 역전이라고 한다. ‘나’가 아닌 다른 사람을 가치관을 벗겨낸 ‘타인’으로 보게 된다는 것은 즉 타인을 자신과는 무관한 사람으로 인식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타자에 대해서 냉담한 것, 다시 말해 “주위의 외적인 것에 무관심한 ‘내적 인간inner man’에 의해 처음으로 풍경이 발견”되는 것이다. 풍경의 탄생은 ‘내적 인간’의 탄생을 의미한다.
서양의 문학사에서는 낭만주의와 리얼리즘의 변화가 장기간 선적인 순서 속에서 일어났다고 보고 이들의 문학사적 분류에 따라 공통점을 은폐하고 있는데, 일본의 문학사(그리고 한국의 문학사에서도) 낭만주의와 리얼리즘이 혼재되어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일본의 문학사에서는 풍경이 발견될 수 있었던 인식의 전도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아와 타자의 구분을 의미하는 ‘내적 인간’의 탄생은 근대화의 기원을 상징한다. 다시 낭만주의와 리얼리즘이 구분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풍경은 인간의 극단적인 내면화를 포착하였다. 전적인 의미에서 풍경은 19세기 낭만파에 의해서 처음 등장하게 된다. 낭만주의자들은 “그동안 터부나 가치에 의해 구분되었던 공간”을 객관화․균질화하였다. 풍경은 원래 그 자체로 있었기 때문에, 낭만파에 의해서 객관적 대상이 된 이후부터는 원래 풍경이 있었던 것처럼 묘사되기 시작한다. 다시 말해 낭만파적인 인식의 전도를 통해서 풍경이 묘사되기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있는 그대로의 사실의 반영이라고 본다면 리얼리즘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리얼리즘 역시 “인간에게서 소원화된 풍경으로서의 풍경”(41)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낭만주의와 리얼리즘은 완벽하게 구분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낭만주의와 리얼리즘은 모두 ‘내적 인간’의 탄생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리얼리즘의 원류’는 ‘낭만주의의 원류’와 같다. ‘풍경’을 발견한다는 것은 이미 풍경에 익숙해진 사상을 벗기고 그 기원은 밝히기 위해서이다.
‘풍경의 발견’ 주관(주체)/와 객관(객체)의 인식론적 공간의 분할을 의미한다. 이는 곧 근대적 인식-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와도 일맥상통한다. 사유의 대상은 아우라를 잃고 “균질적이고 물리학적인 것으로, 즉 연장(延長)으로서 나타”(49)난 것이다. 내적 경험이 있었기에 외적 세계인 풍경이 등장할 수 있었으며 “주관과 객관, 개인적 실재와 공공적 진리고 양분하는 강력하고 혁명적인 창조적 관념”을 얻을 수 있었다. 데카르트적 사유방식이 처음 등장했을 때에는 내적 사유의 치밀한 분석연구가 인기를 끌었으며 진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얻을 수 있었다. 경험론과 관념론은 그러한 맥락에서 등장한 학문이다. 그러나 데카르트적 사유는 진리를 확인할 수 없다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니체와 마르크스, 프로이트는 근대철학의 딜레마를 문제화하고 근본 원인을 찾으려 하였다. 소세키도 그러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전통사회에서 메이지 시대를 거치면서 짧은 시간동안 인식구조의 변화를 체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세키는 보편주의를 주장하는 영문학에 저항해서 ‘한문학’과 ‘소설’을 구분하고 ‘영문학에 속은 듯한’ 느낌에 대응하려고 했다.
풍경의 발견은 내적 인간, 즉 심리적 인간의 탄생과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다. 심리학자인 프로이트는 ‘추상적 사고 언어가 만들어지고 나서야’ ‘내부’가 등장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추상적 사고’가 언어로 정착하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것은 ‘언문일치’로 등장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 언문일치는 메이지 20년 전후에 근대적 제도의 확립 차원에서 등장한다. 이 시기의 내향적 작가들은 문어체를 지향하였다. 문어체는 내적 개인을 표현하는 한 방법이었다. 소세키 이후의 작가들, 대표적으로 돗포는 언문일치라는 제도를 내면화하여 그것의 존재를 잊어버렸다. 현대인들은 모두 언문일치의 배경, 내적 인간으로서의 자의식을 잃어버리고 있다. 내면의 제도성, 역사성이 잊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풍경의 발견은 내적 인간, 근대적 인간을 의미하며 근대적 제도와 언문일치로 이어지는 그물망을 치고 있다. 19세기 ‘소설’의 등장은 풍경의 발견과 내적 인간의 발견이라는 근대적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들은 ‘자명한 것’으로 정착하고 우리는 아무런 비판 없이 변화를 받아들였다. 이 장에서는 아직 그것들이 무엇을 왜 은폐하는지는 다루지 않는다. 다만 은폐를 직감하고 기원을 추적하는 과정을 보여 줄 뿐이다. 특정 대상의 존재를 의심하고 재구성한다는 발상 자체가 근대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대상이 현대인에게 특정한 사고를 강요하며 현대인이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변화의 시점을 찾아서 그 변화가 의미하는 바를 찾아보려고 했던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민음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