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 및 기고문들

이효석,「들」

soru 2008. 7. 18.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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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효석의 「들」에서 사람들의 관계는 육체의 관계로 드러난다. 주인공인 학보와 학교 친구 문수, 고향에 돌아와서 만난 옥분. 이 세 사람의 관계가 그러하다. 학보는 자연의 느낌을 인간 육체의 느낌과 결부시킨다. 이혜령은 육체에 대해서 글을 쓴다는 것, 즉 육체의 텍스트화는 불가피하게 타자성의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육체로 그려지는 대상은 어떠한 주체에 의해 해석되고 특정한 의미를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대체로 타자화된 대상은 억압과 배제의 대상이다. 따라서 육체의 재현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던 학보는 학교에서 쫓겨난 이후 서울을 벗어나 고향의 들에서 자연을 만끽한다. “꽃다지, 질경이, 나생이, 딸장이, 민들레, 솔구장이, 쇠민장이, 길오장이, 달래, 무릇, 시금치, 씀바귀, 돌나물, 비름, 능쟁이” 등의 식물들이 펼쳐져 있는 “초록의 바다” 속에서 학보는 진정한 아름다움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 초록빛은 학보에게 흰 살결을 감추는 여자의 옷처럼 느껴진다. 학보는 자연의 야생성에서 인간의 육체를 느낀다.

  고향의 자연을 보면서 감탄하던 중에 만난 옥분도 그러한 자연의 일부로 느낀다. 옥분은 득추와 혼인을 할 뻔 했지만, 득추가 다른 혼인감을 찾아 나선 바람에 결혼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옥분은 분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들을 뛰놀며 지낸다. 학보는 그런 옥분을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옥분의 “검은 치마폭 밑으로 드러난 불그레한 늠츳한 두 다리”는 “헐벗기 때문에 한결 빛나는 것, 세상에도 가지고 싶은 탐나는 것”(53)이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은 딸기 밭에서 느끼는 식욕과도 결부된다. 학보는 철망을 넘어서 딸기서리를 하는 것과 몸을 통해서 관계를 갖는 것은 모두 "들의 성격"에 기인했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자연력은 생산력과 성적인 약속, 멈추지 않는 관능, 무제한적인 욕망, 심오한 생산적인 에너지들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상징은 “다루기 어려운” 원시성을 의미하며, 도덕성이나 지성과는 먼 존재들을 지칭한다. 자연력이나 원시성을 의미하는 들 또한 하층민을 형상하거나 나약하고 수동적인 인물을 형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학보가 옥분을 하층민으로 바라보는지는 조금 더 생각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학보가 옥분을 자연적 육체성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학보가 자연 자체에서 발견하는 원시성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학보와 문수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인간적 관계는 시골에서 체험하는 몸으로 형상화된다. 학보와 문수는 둘 다 학교에서 사상 문제로 쫓겨난 처지이다. 학보가 먼저 학교를 떠나 시골에서 머무는 동안 문수는 그를 찾아와 함께 어울린다. ("학교가 점점 틀려가는 모양이다." 구체적 실례를 가지가지 들고 나중에는 그 한사람의 협착한 처지를 말하였다. "책 읽는 것까지 들키웠네. 자네 책도 뺏길 뻔했어."(53)) 그리고는 퇴학을 당한다. 그들은 함께 공부를 하고 연설을 하다가도 곧 모래밭에서 씨름을 하거나 강에서 천렵을 한다. 그들의 공부란 자유로운 사상에 대한 것이다. 현실을 비판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길 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협착한 땅 위에 그렇게 자유로운 벌판이 있음"에 즐거워한다. 학보와 문수는 자연 속에서 감탄하고 세계의 아름다움을 만끽한다. 또한 주목해야 할 점은 두 사람이 옥분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옥분이 득추와의 혼사가 깨진 이후로 문수와 몸을 나누었다. 하지만 학보는 거기에 질투를 느낀다거나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홀가분한 느낌을 갖게 된다. 옥분을 책임져야 할 부담을 덜게 된 것이다. 그렇게 자연을 만끽하던 중 학보는 공포를 경험한다. 공포란 바로 현실 속으로 붙잡혀 가는 것이다. 학보와 문수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끌려가서 심문을 당한다. 이들에게 자연은 순수한 것, 사회와 문명은 공포이다.

  이효석은 자연과 섹슈얼리티, 육체의 욕구를 모두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사회적인 것, 현실적인 것, 인간이 만들어 낸 인위적인 관계들을 두려워한다. 인위적인 관계를 회피해서 고향이나 시골을 찾아온 것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효석의 고향은 향토적인 빛을 지닌 것이 아니라 환상적인 유토피아 공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유토피아 안에서 여성 역시 환상적인 대상이 된다. 옥분과 학보 사이에는 정신적인 교감이 전혀 없다. 다만 달빛 아래에서 몸을 섞은 것만으로 인간관계가 성립하는 것이다. 학보도 이에 "사람의 사이란 그렇게 수월할까."하고 자문한다. 자연=여성=야생 / 사회=남성=공포 의 관계 속에서 학보, 즉 이효석은 전자를 희망하는 인간이었다.